군대에서 제대하고 마음먹고 공부하려는데 철학과 1년 후배로 소설가 황석영씨가 입학했다.
숭대극회를 만들어 연극하자니, 시골에서 성장한 나는 신파극 몇 번 밖에 본 경험이 없는데, 연극 하자니, 감이 잡히지 않아 사양했다.
찰거머리 같이 달라붙는 후배의 성화에 못 견뎌 결국 숭대극회가 결성되고 나는 그 뒷바라지를 하게 되었다.
작품은 석영이가 써왔다. ‘폐궁으로 돌아오다.’
연출은 서라벌예대 출신 극작가 전진호씨가 맡았다.
연기할 배우가 없었다. 기숙사에 함께 있던 김덕천을(영문과) 붙잡고 김현승선생님의 차남 문배(경제과)를 설득 했다. 여자 연기 지망생은 더욱 없었다.
학보사에 예쁜 여학생이 두 명 있었다. 오이세(영문과)와 안신자(사학과)였다. 모두들 열심히 해주었다.
공연장은 학교식당, 교직원 코너가 무대고 학생들 영역이 관중석이었다.
조명은 한양대 전기과 학생들이 맡아주고 무대미술은 서울대 미대에서 와서 해주었다.
나는 노량진 목재상에 가서 나무를 사고 지금 학생회관까지 두 번에 걸쳐 어깨에 메고 나른 기억이 난다.
연극경험이 있는 총무처의 신명훈 선생과 오삼순 문학회에서 시를 쓰던 이순배 형이 도와주고 학생처의 김충희 선배도 도와주었다.
조명과 무대장치를 해주던 손님들, 우리 스태프와 캐스트들의 음식은 학교 앞 중국음식점에서 외상으로 해주었다. 그해 11월 20여일에 이틀간 공연했다.
연극이 끝나고 채플에서 고병간 학장께서 표창장과 금일봉을 하사 하셨다.
중국집 외상값도 갚고 연출료도 드렸다. 당시 학생 창작 작품으로 창단공연 한 것은 숭대극회가 처음이었다.
20여년이 지난 후 우리는 공학과 앞에서 야외극으로 쏘포클레스의 ‘안티고네’ 를 공연했다.
연출은 내가 맡았다. 내 연출로 민주계단에서 T. S. 엘리엇의 ‘대성당의 살인’ 도 공연했다.
이 작품은 숭실대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작품으로 성공회 대성당에서도 공연했다.
이때의 연출은 정종화 선생이었다.
민주계단은 사라졌지만, 대학극장(블루큐브 극장)이 다시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반갑고 그립다.
그리고 늘 숭대극회 출신들이 연극계에서 활동하는 것을 보면 반갑고 대견하다.
-이 반-